Anonymous specimen
One Summer's Day
이름 없이 남겨진 문장을 표본지처럼 조용히 읽습니다.
매미 소리가 벽처럼 서 있는 오후가 있다. 공기는 무겁고, 시간은 어딘가에 발이 묶인 것처럼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날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인 것 같아서, 나만 이 계절에 갇힌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해는 조금씩 기운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오후에도 그림자는 방향을 바꾸고, 바람은 오지 않는 척하다가 문득 커튼을 흔들고 간다. 멈춘 줄 알았던 것들은 사실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을 뿐이다.
여름이 끝난다는 걸 알기에 여름을 견딜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의 이 고요한 정체도 계절의 한가운데일 뿐이라고 믿기로 한다. 서두르지 않고, 다만 멈추지도 않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쪽으로, 한 걸음.
자전거 페달이 헛도는 것 같은 날들이 있다. 힘껏 밟는데도 풍경이 바뀌지 않아서, 내가 가고 있는 건지 여름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날들.
그런데 이상하지. 한참 뒤에 돌아보면 그 헛돌던 길 위에도 빛은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오후가, 나중엔 제일 오래 남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달리기로 한다. 어디에 닿는지는 계절이 알아서 정하게 두고. 여름은 원래 그렇게 지나가라고 있는 계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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